장애인에 ‘옷 날개’…일터 만들어 자립 부축…윤정의씨

  장애여성에게도 결혼식은 가장 귀한 행사. 휠체어 대신 ‘웨딩체어(Wedding Chair)’를 만들어냈다. 신부가 가장 아름다워야 할 그 날만큼은 신랑과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볼 수 있어야 하니까.


장애인에 ‘옷 날개’…일터 만들어 자립 부축…윤정의씨
 
여기,손 하나가 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떠오른 손가락들은 세월이 새긴 굵은 주름으로 산과 계곡을 만든다. 뭉툭해진 손톱과 만나 삶 하나를 이룬다,
윤정의(여·41)씨의 손은 늘 바쁘다. 여성 장애인들의 희망이 되는 웨딩드레스의 고은 선도,장애인들의 자립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국수 공장의 미래도 모두 그 손에서 나온다.
지금,세상의 모든 행복을 쥐고 있는 그 손은 그러나 한 때 절망이요,지옥이요,분노였다.

“막 걷기 시작한 3살 때 열병을 앓았죠.”
척추마비. 청천벽력이었다. 2남2녀의 막내였던 그를 업고 부모는 전국 방방곡곡 명의를 찾아 헤맸다. 두 번의 수술,계속된 실패. 평생 휠체어에 앉아 지내야 한다는 운명을 그도,부모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수년간 일어서기를 연습하는 뼈를 깎는 노력이 계속됐고,기적이 찾아왔다. 보조기와 목발만으로 서고,걸을 수 있게 됐었다. 몸은 앞으로 움직였으나 마음은 뒤걸음질쳤다.
 
“동정보다는 미움이 차라리 나았습니다.”
미움을 받기 위해 상대방이 가장 아파할 말들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찾아내 툭툭 던졌다. 온몸이 날이 선 대패가 돼 거칠게 세상과 맞섰다.
 
마음 속의 칼 끝을 벼리는 사이,타인은 지옥이었다. 혼자있던 방 안에서의 위독했던 시절들,보조기와 목발 없이는 깨금발로도 서지 못하는 날들에 숱하게 잔디밭을 맨발로 걸으며 노을을 바라보고 싶던 10대,20대였다.
 
그렇게 서른살을 맞았다. 훌쩍 호주로 어학 연수를 떠난 그는 난생 처음으로 역할극을 하게 됐다. 체육시간에도,연극시간에도 다리가 성치 않다는 이유로 늘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던 그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름 사람이 된 순간,‘아,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느닷없고 았싸한 깨달음과 함께 늘 자신의 벽 안에 꼭꼭 숨어있던 자아가 마법처럼 그를 박차고 나왔다. ‘진짜 윤정의’는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자 눈에 사람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달라지자 세상도 달라진 것이다. 주먹을 쥐고 세상의 모든 분노를 모았던 그 손을 활짝 폈다. 베풂도,사랑도,혁명도,모두 그 손에서 완성돼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우연히 한국장애인의상연구소의 김성윤(여?43) 소장을 만난 2002년 10월,그는 ‘윤 실장’으로 새로 태어났다. 성균관대 의상학과를 졸업한 자신의 전력이 이토록 쓰임새가 있을 줄 몰랐다.
 
김 소장을 도와 비싼 고급 기성복도,유명한 브랜드의 옷도 아닌 장애인이 그저 혼자 입기 좋고 벗기 편한 옷을 만들어냈다. 소변 주머니나 기저귀를 착용해야 하는 하반신 마비자를 위해 앞 지퍼를 깊게 달고,목발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겨드랑이를 넉넉히 하거나 트임을 넣어 구김이 가지 않도록 만들었다. 손이 마비된 이에게는 자석단추 옷을 입혀 주었다.
 
언제였을까. 자신도 몸이 불편한 장애인으로서 윤씨의 머리 속에 섬광처럼 무언가가 스쳤다. “편한 옷만 필요한가요. 파티복이나 웨딩드레스도 있어야죠.”
 
일상의 모든 행복을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누리기 위해서는,아,그래,특별한 옷이 필요해!
 
장애여성에게도 결혼식은 가장 귀한 행사. 장애에 맞춰 다양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개발하고,휠체어 대신 ‘웨딩체어(Wedding Chair)’를 만들어냈다. 신부가 가장 아름다워야 할 그 날만큼은 신랑과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볼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웨딩드레스와 남성 장애인을 위한 멋드러진 턱시도가 장애인의상연구소에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김 소장과 윤씨의 고민이 깊어졌다. 기부금만으로는 장기적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 향상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국수 공장. 가장 서민적이고,사시사철 어느 때나 먹을 수 있는 국수 공장을 세우자고 의기투합,부산에 터를 잡고 기계를 들였다. 김 소장이 경기도의 한 국수 공장에서 기술을 배워와 끊임없이 연습하고 실험했다.
 
지난해 7월,이렇게 ‘행복한 국수 공장’이 태어났다. 김 소장과 윤씨는 행복한 국수 공장을 기반으로 의상 뿐만이 아니라 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어내고 싶단다.
 
장애인을 위한 웨딩플래너,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는 파티 기획,행복한 국수 공장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시식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윤씨는 요즘 너무 행복하다.
 
그는 이제 안다. 삶의 의미는 모든 흐르는 시간의 규칙을 배반하고 겹치고 관통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 아픔이 가장 크다고 엄살 부리지 않을 정도의 균형 감각으로 다른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깊이 있게 바라보고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그의 삶이 행복한 이유다.
 
몸으로 마음으로 심하게 앓았던 긴 터널을 지나 이제 윤씨는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뱉는 것이라고 했던가.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가는 일이 참으로 복되고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그.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상처에서 날마다 물을 길어 삶을 살리는 이땅의 장애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게 윤씨의 마지막 꿈이다.
 
“무엇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인가요?”
게걸스런 눈빛으로 요철(凹凸) 또렷한 도발적인 육체의 표면만을 탐식하는 세상에서 윤씨는 정신의 탈 것인 자신의,아니 우리들의 모든 육체는 아름다운 거라고 외친다.
 
두 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장애,‘아,그러나 이것이 내 삶의 가장 말랑말랑한 생명 덩어리구나’라며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웨딩드레스와 국수를 오늘도 열심히 만들고 있다.
 
(국민일보 2004. 2.1) 서지현기자 san@kmib.co.kr